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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타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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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타 조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67년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하여 1990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통산 215승을 기록하며,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마사카리 투구법으로 불리는 독특한 투구 폼과 포크볼을 주무기로 삼았으며, 1985년에는 토미 존 수술 이후 컴백하여 컴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와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2년 자택 화재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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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타 조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은퇴 경기에서의 무라타 조지 (가와사키 구장)
포지션투수
투구/타석우투/우타
출생일1949년 11월 27일
사망일2022년 11월 11일
출생지히로시마현 도요타군 혼고정(현: 미하라시)
사망 장소세타가야구, 도쿄도, 일본
프로 입단 정보
드래프트드래프트 1위
첫 출장1968년 10월 8일
마지막 출장1990년 10월 13일 (은퇴 경기)
선수 경력
소속 팀도쿄 오리온스/롯데 오리온스 (–)
코치 경력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NPB 성적
승-패215–177
평균 자책점3.24
완봉승36
투구 이닝3,331.1
탈삼진2,363
수상 경력
주요 수상ERA 3회
명예의 전당
헌액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2005년)
헌액 유형일본

2. 프로 입단 전

무라타 조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야간 경기를 관전한 것을 계기로 프로 야구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8] 처음으로 직접 관전한 프로 경기에 큰 감명을 받아, 이후 프로 야구 선수 외의 다른 진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쿠야마 전파 공업고등학교(현재의 긴키 대학 부속 히로시마 고등학교 후쿠야마 분교) 시절부터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는데, 당시 스피드건이 있었다면 152~153km/h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평가받을 정도였다.[112][8] 2학년 때까지는 아사노 게이시의 후보 선수였으나,[112]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가 되었다.

당시 히로시마 현에는 미무라 도시유키, 야마모토 가즈유키가 소속된 히로시마 상업 고등학교, 1967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 준우승을 이끈 고료 고등학교 등 강호들이 많아 고시엔 대회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9] 1966년 가을 중국 대회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 고료 고교에, 이듬해 여름 현 예선 3회전에서 고코 고교에 패했다.[9] 비록 고시엔 진출은 실패했지만, 히로시마 카프의 키바 오사무 스카우트로부터 "드래프트 1위로 지명하겠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뻐했다.[9][10] 도쿄 오리온즈는 1위 지명 선수를 결정하지 못하고 노토 와타루 감독이 우에무라 요시노부 투수 코치에게 결정을 일임했는데,[11] 우에무라는 영상을 보고 무라타의 강한 어깨와 유연한 몸을 확인한 후 지명을 추천했다.[11] 1967년 드래프트에서 6번째로 지명권을 얻은 도쿄 오리온즈가 무라타를 1위로 지명했다.[9]

2. 1. 유소년 시절

무라타 조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야간 경기를 관전한 것을 계기로 프로 야구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8] 처음으로 직접 관전한 프로 경기에 큰 감명을 받아, 이후 프로 야구 선수 외의 다른 진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후쿠야마 전파 공업 고등학교(현 킨키 대학 부속 히로시마 고등학교 후쿠야마 분교) 시절부터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로 유명했는데, 당시 스피드건이 있었다면 152~153km/h를 기록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112][8] 2학년 때까지는 아사노 게이시의 후보 선수였으나,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히로시마 현에는 미무라 도시유키, 야마모토 가즈유키 등이 소속된 히로시마 상업 고등학교나, 1967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 준우승을 이끈 고료 고등학교 등 강호들이 있어 고시엔 대회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9]

1966년 가을 중국 대회 현 예선에서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고료 고등학교에게 패했고, 이듬해 여름 현 예선에서도 3회전에서 고코 고교에 패했다.[9] 비록 고시엔 진출은 실패했지만, 히로시마 카프의 키바 오사무 스카우트로부터 "드래프트 1위로 지명하겠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뻐했다.[9][10] 도쿄 오리온즈는 1위 지명 선수를 결정하지 못하고 노토 와타루 감독이 우에무라 요시노부 투수 코치에게 결정을 일임했는데,[11] 우에무라는 영상을 보고 무라타의 강한 어깨와 유연한 몸을 확인한 후 지명을 추천했다.[11] 1967년 드래프트에서 6번째로 지명권을 얻은 도쿄 오리온즈가 무라타를 1위로 지명했다.[9]

2. 2. 고교 시절

무라타 조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와 함께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야간 경기를 관전한 것을 계기로 프로 야구 선수를 꿈꾸게 되었다.[8] 처음으로 직접 관전한 프로 경기에 큰 감명을 받아, 이후 프로 야구 선수 외의 다른 진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쿠야마 전파 공업고등학교(현재의 긴키 대학 부속 히로시마 고등학교 후쿠야마 분교) 시절부터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는데, 당시 스피드건이 있었다면 152~153km/h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평가받을 정도였다.[112],[8] 2학년 때까지는 아사노 게이시의 후보 선수였으나,[112] 2학년 가을부터 에이스가 되었다.

당시 히로시마 현에는 미무라 도시유키, 야마모토 가즈유키가 소속된 히로시마 상업 고등학교, 1967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 준우승을 이끈 고료 고등학교 등 강호들이 많아 고시엔 대회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9] 1966년 가을 중국 대회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 고료 고교에, 이듬해 여름 현 예선 3회전에서 고코 고교에 패했다.[9]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6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한 무라타는 등번호는 에이스 넘버인 "18"을 희망했지만 구단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29'''"가 되었다. 이 "29"번은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었다.

프로 1년차인 1968년에는 단 한 번도 승리없이 1패만 기록하여 부진에 시달렸는데 당시에는 드래프트 1순위로 계약금이 남아돌아 파칭코나 마작과 같은 도박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까지 마작을 마치고 홀로 숙소에 돌아왔을 때 일과인 트레이닝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던 고야마 마사아키와 우연히 마주치게 됐다. 그 때 이미 베테랑 투수였던 고야마가 젊은 자신보다도 훨씬 더 힘든 연습을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그대로 도망치듯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후 연습 중에 고야마에게 사과하러 갔을 때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걸 낭비하는건 아깝지 않냐”라고 질책을 받았다. 야구계를 대표하는 간판 투수에게서 질책을 받고 그것에 감명을 받은 무라타는 이후에 마치 딴 사람과 같은 연습에만 몰두하게 됐다고 한다. 젊은 시절 무라타의 롯데에는 고야마 외에도 나리타 후미오, 기타루 마사아키, 사카이 가쓰지, 가네다 도메히로 등과 같은 간판 투수들이 있어서 무라타는 그들로부터 투구 방법을 배워 나갔다. 또한 1973년부터 감독으로 취임한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컨디션 조절 방법을 배웠다. 또한 타격 연습에 있어서도 엄한 자세를 보이던 에노모토 기하치에게도 프로 야구 선수로서 영향을 받았다.

구단명을 ‘롯데 오리온스’로 변경한 프로 2년째인 1969년에 두각을 나타내며 시즌 6승(그 중 5승은 완봉)을 올렸다. 이듬해 1970년에는 퍼시픽 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그 다음해인 1971년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바탕으로 투구 폼을 큰폭으로 개조하는 등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는 이른바 ‘'''마사카리 투구법'''’(マサカリ投法일본어)을 완성시켰다. 그 해에 시즌 12승을 올려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활약해 1974년의 롯데가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을 때에도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6차전에서 선발 등판해 연장 10회까지 145개의 공을 던지는 등의 활약으로 승리 투수가 되면서 팀을 일본 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1976년에는 포크볼을 습득했는데 보통 평범하지 않은 긴 손가락이 낳는 예리할 정도의 날카로운 변화는 매번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게 했다. 그 해의 시즌에는 257이닝을 던져 21승(14선발승)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평균 자책점 1.82를 기록하여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 202개의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포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노 사인’으로 스스로 투구를 조절했기 때문에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폭투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32경기에 선발로 나와 개인 최다인 21차례 완투와 23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개막 11연승을 장식하여 시즌 19승을 기록하는 등 다승왕 타이틀도 획득해 스즈키 게이시, 야마다 히사시, 히가시오 오사무 등과 함께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투수가 됐다.

그러나 1982년에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여러 가지 치료법을 병행하였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애독했다.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정의 식수원(약수터)인 쓰즈라후치에서 좌선을 하며 심야에 흰 옷을 걸치고 폭포수를 맞으며 수행을 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오프 시즌에는 인기가 전혀 오르지 않는 롯데에 대한 불만으로 센트럴 리그의 인기 구단인 한신 타이거스의 이적을 지원했지만 맞교환에 필요한 인원이 정해지지 않아 결국 롯데에 잔류했다.[29][30] 이듬해 1983년에도 팔꿈치의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미국으로 도미해 스포츠 의학의 권위있는 학자로 알려진 프랭크 조브의 집도하에 왼팔의 힘줄을 오른쪽 팔꿈치에 이식하는 수술(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이후 2년 간을 재활훈련에만 전념해 1984년 시즌 종반에 복귀했다.[33]

이듬해 1985년, 개막 이후부터 11연승을 올렸다고 하는 강렬한 부활극을 선보여 최종적으론 17승 5패의 성적으로 컴백상을 수상했고 작년에 계속되는 롯데의 정규 리그 2위에 기여했다. 이 해의 개막 이후부터 11연전 11연승 기록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37] 그 해부터 6일을 쉬고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을 하게끔 됐기 때문에 ‘'''선데이 조지'''’(サンデー兆治일본어)라고도 불리게 됐다. 또한 일본 야구계에서는 오랜 세월 투수의 팔꿈치에 메스를 가하는 것은 금기시돼 있었지만 무라타의 부활에 의해 효과있는 치료법으로서 인식되게 됐다.[38][39]

1989년 5월 13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야마가타 현 야구장)에서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200승에 결정적인 수단을 동원했던 4월 1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연장 11회를 던져내면서 패전 투수가 됐지만 그 경기를 닛폰 TV가 경기 종료할 때까지 중계하였고 원래 《쇼텐》이 방송되는 17시 20분부터 17시 39분까지 시간대의 시청률은 그 날 밤 요미우리-다이요전을 웃도는 22.4%(간토 지구)를 기록했다(전체적으로는 10.9%).[57] 같은 해 39세의 나이로 통산 3번째의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했다. 그 다음해인 1990년, 10승(9선발승)을 남기면서 자신으로서는 10번째의 두 자릿수 승리(두 자릿수 선발승 - 71년 12, 74년 11, 76년 14, 77년 12, 78년 12, 79년 17, 81년 19, 85년 17,88년 10)를 거두었다. 와카바야시 다다시 이후 역대 2번째가 되는 40대로서의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지만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또한 이 은퇴에 의해서 1960년대에 프로에 입문했던 선수들 모두 현역에서 은퇴했다.

3. 1. 롯데 오리온스 / 지바 롯데 마린스 (1968-1990)

1967년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에이스 넘버인 "18"을 희망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하고 "'''29'''"가 되었다. 이 "29"번은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었다.

1년차인 1968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드래프트 1순위 계약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칭코나 마작 등 유흥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샘 마작을 마치고 독신 기숙사에 아침 일찍 돌아왔을 때, 일과인 로드워크를 시작하려던 고야마 마사아키와 마주치게 된다. 당시 이미 베테랑이었던 고야마가 젊은 자신보다 훨씬 더 엄격한 연습을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대로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연습 중에 고야마에게 사과하러 갔을 때, "너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낭비하는 것은 슬프지 않느냐"고 타이르는 말을 들었다. 구계를 대표하는 대투수의 질책과 격려에 감동한 무라타는 이후 다른 사람처럼 연습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라타의 젊은 시절 롯데에는 고야마 외에도 나리타 후미오, 키타루 마사아키, 사카이 카츠지, 카네다 토모히로 등 명투수가 있어, 무라타는 그들에게 투구술을 배웠다. 또한, 1973년부터 감독을 맡은 카네다 마사이치에게 컨디셔닝 방법을 배웠다. 타격 연습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자세를 보였던 에노모토 키하치에게도 프로 야구 선수로서 영향을 받았다.

구단명이 롯데가 된 2년차인 1969년에 두각을 나타내, 5월 중순에는 선발의 한 축으로 발탁된다. 같은 해 6승(그 중 5승은 완봉)을 기록했고, 처음으로 규정 투구 이닝에도 도달했다. 1970년에는 퍼시픽 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1971년, 후에 감독이 되는 카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바탕으로, 콘도 사다오 투수 코치에 의해 투구 폼을 대폭 개조하여,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는 "'''마사카리 투구법'''"(マサカリ投法일본어)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같은 해 12승을 올려 좋은 성적을 남겼다.

1974년의 롯데의 리그 우승 때도 맹활약을 펼쳤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에 등판했다. 1차전(주니치 구장)에서는 9회말에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지만, 다카기 모리미치에게 역전 끝내기 2루타를 맞았다.[12] 2차전(주니치 구장), 4차전(고라쿠엔 구장)은 마무리 투수로서 승리에 기여했고, 4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전날의 스즈키 타카마사(주니치)에 이어 "롯데 오리온즈"의 선수로서 시리즈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13] 최종 6차전(주니치 구장)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마츠모토 코우유키, 호시노 센이치와의 투수전을 제압하고 연장 10회까지 던져, 완투 승리[14]를 거두어,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15]

1976년에는 포크볼을 습득한다. 남들보다 긴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변화는, 번번이 타자의 배트를 헛돌게 했다. 9월 10일의 대니혼햄 파이터스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5차례의 완봉승을 포함해 시즌 첫 20승을 거두었고,[21] 같은 해 시즌에는 257이닝을 던져 21승을 거두는 동시에, 평균 자책점 1.82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22]했다. 202탈삼진도 리그 최다였다. 포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노 사인"으로 스스로 투구를 구성했기 때문에, 같은 해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 폭투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3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자기 최고 기록인 21완투・230탈삼진을 남겼다.

1981년에는 개막 11연승을 장식했고,[23] 시즌에서는 한큐의 이마이 유타로와 함께 19승으로 최다승 타이틀도 획득[24]하여, 스즈키 케이지, 야마다 히사시, 히가시오 슈 등과 함께 쇼와 50년대의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되었다.

1982년, 4월 3일의 난카이와의 개막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9회 5실점으로 시즌 첫 승리를 완투로 장식했다.[25] 이어서 같은 달 8일의 대세이부 라이온즈전(헤이와다이 구장)[26], 같은 달 13일의 대 세이부전(세이부 구장)에서 2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두었지만,[27] 같은 달 21일에 오른 팔꿈치를 부상당했다.[28] 다양한 치료법을 시도하는 한편,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애독하고 와카야마현시라하마정의 물가・주쿠부치에서 좌선을 하고, 심야에 흰 옷을 입고 폭포에 맞는 등 고행도 했다. 같은 해 오프에는 전혀 인기가 오르지 않는 롯데에 대한 불만에서 센트럴 리그의 인기 구단인 한신 타이거스로의 이적을 원했지만, 교환 선수가 결정되지 않아 롯데에 잔류했다.[29][30] 12월 10일자 『주니치 스포츠』에 따르면, 9일에는 과거 롯데 투수 코치로서 무라타를 지도했던 콘도 사다오가 감독을 맡고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의 구단 대표・스즈키 노후가 롯데의 구단 대표・이시하라 테루오에게 획득 의사가 있다는 것을 연락한 것을 시작으로, 한신이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 무라타 본인과 당시 롯데 감독을 맡고 있던 야마모토 카즈요시의 고향인 히로시마현에 연고지를 둔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 센트럴 리그 각 구단도 잇달아 교환 트레이드를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야쿠르트 스왈로스도 금전 트레이드로 획득을 희망,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도 세키네 쥰조 감독의 의향을 바탕으로 획득을 검토할 전망이라고 보도되었지만,[31] 같은 달 13일에는 롯데 구단 오너인 시게미츠 타케오가 무라타에게, 구단 사장인 마츠이 시즈로를 통해 트레이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무라타는 이를 불복했지만,[32] 최종적으로 트레이드는 성사되지 않았다.

다음 1983년에도 팔꿈치 증세가 전혀 개선되지 않아,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의학의 권위자인 프랭크 조브의 집도 아래, 왼팔의 힘줄을 오른 팔꿈치에 이식하는 수술(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이후 2년간을 재활에 쏟았고, 1984년 시즌 후반에 복귀했다.[33]

1985년, 4월 14일의 세이부와의 개막전(가와사키 구장)[34]부터 7월 7일의 대 난카이전(신 오이타 구장)까지 개막 11연승(그 중, 4월 14일부터 5월 26일까지 일요일 7연승)[35]을 거두는[36] 괄목할 만한 부활극을 보여, 최종적으로 17승 5패의 성적으로 컴백상을 수상했다. 전년에 이은 롯데의 리그 2위에 기여했다. 이 해의 개막 이후 11연전 11연승 기록은 프로 야구 기록이다.[37] 같은 해부터, 6일 간격으로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선데이 쵸지'''"(サンデー兆治일본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당시, 6일 간격으로 등판하는 선발 투수는, 다른 선수로는 같은 해에 두각을 나타낸 곽태원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고, 곽과 함께 6일 로테의 선구자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일본 야구계에서는 오랫동안 투수의 팔꿈치에 메스를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지만, 무라타의 부활로 인해 유효한 치료법으로 인식되게 되었다.[38][39]

1986년, 4월 6일의 한큐와의 개막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역투했으나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8회에 4연속 안타를 맞고[40] 패전 투수가 되었고,[41] 5월 11일의 대 세이부전(세이부 구장)에서 3실점 완투패로 개막 5연패를 기록했다.[42] 같은 달 25일의 대 한큐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실점 완투 승리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43] 시즌 통산으로는 8승 11패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끝났다.[44] 오프의 12월 19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100만 엔 감액된 연봉 43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44]

1987년, 4월 10일의 킨테츠 버팔로스의 개막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는 동성인 무라타 타츠미와 맞대결을 벌여, 5회 7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45] 같은 달 19일의 대 한큐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5년 만의 완봉승으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다.[46] 7월 5일의 대 킨테츠전(쿠시로 시민 구장)에서는 6년 만의 무사사구 완투로 2번째 시즌 2번째 완봉승[47], 9월 20일의 대 세이부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3회에 이시게 히로노리로부터 헛스윙 삼진을 잡아, 역대 13번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지만, 4회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48] 오프의 12월 15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2% 인상된 연봉 44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49]

1988년, 4월 8일의 니혼햄과의 개막전(도쿄 돔)에서 7회 2실점으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다.[50] 4월 24일의 대 난카이전(미야기 구장)에서는 시즌 유일의 완봉승[51], 10월 3일의 대 한큐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8회 도중까지 던져, 2실점으로 3년 만의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52] 오프의 12월 12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1100만 엔 인상된 연봉 55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53]

1989년, 4월 9일의 세이부와의 개막전(세이부 구장)에서 시즌 첫 승리를 완봉으로 장식했다.[54] 5월 13일의 대 니혼햄전(야마가타현 야구장)에서 통산 200승을 달성[55]했다. 200승에 1승만을 남겨두었던 4월 16일의 대 킨테츠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연장 11회를 던졌지만 패전 투수가 되었다.[56] 그 경기를 "〇요일 나이트"가 경기 종료까지 중계했고, 원래 "웃는 츠보"가 방송되는 17:20 - 17:39 시간대의 시청률은 그날 밤의 요미우리-다이요전을 넘는 22.4%(관동 지역)를 기록했다(전체에서는 10.9%)[57] 6월 28일의 대 니혼햄전(도쿄 돔)에서 시즌 2번째 완봉승[58]

7월 12일의 대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11탈삼진으로 10년 만의 시즌 3차례 완봉승을 장식했고, 통산 203승은 당시 역대 18위의 호리우치 츠네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59] 올스타전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3회 2안타 3탈삼진 무실점의 성적[60]으로 MVP로 선정되었다.[61] 같은 해, 39세의 나이로 3번째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62] 오프의 12월 28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1900만 엔 인상된 연봉 74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63]

코치 겸임으로 임한 다음 1990년, 4월 8일의 대오릭스 브레이브스와의 개막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실점 완투 승리[64]로 에가와 츠요시와 함께 통산 206승을 거두었다. 8월 24일의 대 세이부전(세이부 구장)에서는 통산 600경기 등판을 시즌 첫 완봉으로 장식했다.[66] 10월 13일의 레귤러 시즌 최종전의 대 세이부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5회 강우 콜드 게임으로 같은 해 2번째 완봉 포함 10승을 기록하고, 10번째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67] 와카바야시 타다시 이후 41년 만, 역대 2번째로 40대에서의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고, 최종전에서의 은퇴 기념 행사 실시로 현역에서 은퇴했다.[67]

3. 1. 1. 마사카리 투구법

1967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한 무라타는 1971년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바탕으로 투구 폼을 크게 개조하여 후에 자신의 대명사가 되는 이른바 ‘'''마사카리 투구법'''’(マサカリ投法일본어)을 완성시켰다.[113] 그 해에 시즌 12승을 올려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74년 롯데가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을 때에도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6차전에 선발 등판해 연장 10회까지 145개의 공을 던지는 등의 활약으로 승리 투수가 되면서 팀을 일본 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3. 1. 2. 전성기

1967년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에이스 넘버인 "18"을 희망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하고 "'''29'''"가 되었다. 이 "29"번은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었다.

1년차인 1968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드래프트 1순위 계약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칭코나 마작 등 유흥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샘 마작을 마치고 독신 기숙사에 아침 일찍 돌아왔을 때, 일과인 로드워크를 시작하려던 고야마 마사아키와 마주치게 된다. 당시 이미 베테랑이었던 고야마가 젊은 자신보다 훨씬 더 엄격한 연습을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대로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연습 중에 고야마에게 사과하러 갔을 때, "너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낭비하는 것은 슬프지 않느냐"고 타이르는 말을 들었다. 구계를 대표하는 대투수의 질책과 격려에 감동한 무라타는 이후 다른 사람처럼 연습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라타의 젊은 시절 롯데에는 고야마 외에도 나리타 후미오, 키타루 마사아키, 사카이 카츠지, 카네다 토모히로 등 명투수가 있어, 무라타는 그들에게 투구술을 배웠다. 또한, 1973년부터 감독을 맡은 카네다 마사이치에게 컨디셔닝 방법을 배웠다. 타격 연습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자세를 보였던 에노모토 키하치에게도 프로 야구 선수로서 영향을 받았다.

구단명이 롯데가 된 2년차인 1969년에 두각을 나타내, 5월 중순에는 선발의 한 축으로 발탁된다. 같은 해 6승(그 중 5승은 완봉)을 기록했고, 처음으로 규정 투구 이닝에도 도달했다. 1970년에는 퍼시픽 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1971년, 후에 감독이 되는 카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바탕으로, 콘도 사다오 투수 코치에 의해 투구 폼을 대폭 개조하여,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는 "'''마사카리 투구법'''"(マサカリ投法일본어)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같은 해 12승을 올려 좋은 성적을 남겼다.

1974년의 롯데의 리그 우승 때도 맹활약을 펼쳤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에 등판했다. 1차전(주니치 구장)에서는 9회말에 마무리 투수로 등판했지만, 다카기 모리미치에게 역전 끝내기 2루타를 맞았다.[12] 2차전(주니치 구장), 4차전(고라쿠엔 구장)은 마무리 투수로서 승리에 기여했고, 4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전날의 스즈키 타카마사(주니치)에 이어 "롯데 오리온즈"의 선수로서 시리즈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13] 최종 6차전(주니치 구장)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마츠모토 코우유키, 호시노 센이치와의 투수전을 제압하고 연장 10회까지 던져, 완투 승리[14]를 거두어,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15]

1976년에는 포크볼을 습득한다. 남들보다 긴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변화는, 번번이 타자의 배트를 헛돌게 했다. 9월 10일의 대니혼햄 파이터스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5차례의 완봉승을 포함해 시즌 첫 20승을 거두었고,[21] 같은 해 시즌에는 257이닝을 던져 21승을 거두는 동시에, 평균 자책점 1.82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22]했다. 202탈삼진도 리그 최다였다. 포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노 사인"으로 스스로 투구를 구성했기 때문에, 같은 해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 폭투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3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자기 최고 기록인 21완투・230탈삼진을 남겼다.

1981년에는 개막 11연승을 장식했고,[23] 시즌에서는 한큐의 이마이 유타로와 함께 19승으로 최다승 타이틀도 획득[24]하여, 스즈키 케이지, 야마다 히사시, 히가시오 슈 등과 함께 쇼와 50년대의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되었다.

1982년, 4월 3일의 난카이와의 개막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9회 5실점으로 시즌 첫 승리를 완투로 장식했다.[25] 이어서 같은 달 8일의 대세이부 라이온즈전(헤이와다이 구장)[26], 같은 달 13일의 대 세이부전(세이부 구장)에서 2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두었지만,[27] 같은 달 21일에 오른 팔꿈치를 부상당했다.[28] 다양한 치료법을 시도하는 한편,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애독하고 와카야마현시라하마정의 물가・주쿠부치에서 좌선을 하고, 심야에 흰 옷을 입고 폭포에 맞는 등 고행도 했다. 같은 해 오프에는 전혀 인기가 오르지 않는 롯데에 대한 불만에서 센트럴 리그의 인기 구단인 한신 타이거스로의 이적을 원했지만, 교환 선수가 결정되지 않아 롯데에 잔류했다.[29][30] 12월 10일자 『주니치 스포츠』에 따르면, 9일에는 과거 롯데 투수 코치로서 무라타를 지도했던 콘도 사다오가 감독을 맡고 있던 주니치 드래곤즈의 구단 대표・스즈키 노후가 롯데의 구단 대표・이시하라 테루오에게 획득 의사가 있다는 것을 연락한 것을 시작으로, 한신이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 무라타 본인과 당시 롯데 감독을 맡고 있던 야마모토 카즈요시의 고향인 히로시마현에 연고지를 둔 히로시마 도요 카프 등 센트럴 리그 각 구단도 잇달아 교환 트레이드를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야쿠르트 스왈로스도 금전 트레이드로 획득을 희망,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도 세키네 쥰조 감독의 의향을 바탕으로 획득을 검토할 전망이라고 보도되었지만,[31] 같은 달 13일에는 롯데 구단 오너인 시게미츠 타케오가 무라타에게, 구단 사장인 마츠이 시즈로를 통해 트레이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무라타는 이를 불복했지만,[32] 최종적으로 트레이드는 성사되지 않았다.

다음 1983년에도 팔꿈치 증세가 전혀 개선되지 않아,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의학의 권위자인 프랭크 조브의 집도 아래, 왼팔의 힘줄을 오른 팔꿈치에 이식하는 수술(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이후 2년간을 재활에 쏟았고, 1984년 시즌 후반에 복귀했다.[33]

1985년, 4월 14일의 세이부와의 개막전(가와사키 구장)[34]부터 7월 7일의 대 난카이전(신 오이타 구장)까지 개막 11연승(그 중, 4월 14일부터 5월 26일까지 일요일 7연승)[35]을 거두는[36] 괄목할 만한 부활극을 보여, 최종적으로 17승 5패의 성적으로 컴백상을 수상했다. 전년에 이은 롯데의 리그 2위에 기여했다. 이 해의 개막 이후 11연전 11연승 기록은 프로 야구 기록이다.[37] 같은 해부터, 6일 간격으로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선데이 쵸지'''"(サンデー兆治일본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당시, 6일 간격으로 등판하는 선발 투수는, 다른 선수로는 같은 해에 두각을 나타낸 곽태원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고, 곽과 함께 6일 로테의 선구자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일본 야구계에서는 오랫동안 투수의 팔꿈치에 메스를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지만, 무라타의 부활로 인해 유효한 치료법으로 인식되게 되었다.[38][39]

1986년, 4월 6일의 한큐와의 개막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역투했으나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8회에 4연속 안타를 맞고[40] 패전 투수가 되었고,[41] 5월 11일의 대 세이부전(세이부 구장)에서 3실점 완투패로 개막 5연패를 기록했다.[42] 같은 달 25일의 대 한큐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실점 완투 승리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43] 시즌 통산으로는 8승 11패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끝났다.[44] 오프의 12월 19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100만 엔 감액된 연봉 43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44]

1987년, 4월 10일의 킨테츠 버팔로스의 개막전(후지이데라 구장)에서는 동성인 무라타 타츠미와 맞대결을 벌여, 5회 7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45] 같은 달 19일의 대 한큐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5년 만의 완봉승으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다.[46] 7월 5일의 대 킨테츠전(쿠시로 시민 구장)에서는 6년 만의 무사사구 완투로 2번째 시즌 2번째 완봉승[47], 9월 20일의 대 세이부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3회에 이시게 히로노리로부터 헛스윙 삼진을 잡아, 역대 13번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지만, 4회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48] 오프의 12월 15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2% 인상된 연봉 44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49]

1988년, 4월 8일의 니혼햄과의 개막전(도쿄 돔)에서 7회 2실점으로 시즌 첫 승리를 거두었다.[50] 4월 24일의 대 난카이전(미야기 구장)에서는 시즌 유일의 완봉승[51], 10월 3일의 대 한큐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8회 도중까지 던져, 2실점으로 3년 만의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52] 오프의 12월 12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1100만 엔 인상된 연봉 55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53]

1989년, 4월 9일의 세이부와의 개막전(세이부 구장)에서 시즌 첫 승리를 완봉으로 장식했다.[54] 5월 13일의 대 니혼햄전(야마가타현 야구장)에서 통산 200승을 달성[55]했다. 200승에 1승만을 남겨두었던 4월 16일의 대 킨테츠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연장 11회를 던졌지만 패전 투수가 되었다.[56] 그 경기를 "〇요일 나이트"가 경기 종료까지 중계했고, 원래 "웃는 츠보"가 방송되는 17:20 - 17:39 시간대의 시청률은 그날 밤의 요미우리-다이요전을 넘는 22.4%(관동 지역)를 기록했다(전체에서는 10.9%)[57] 6월 28일의 대 니혼햄전(도쿄 돔)에서 시즌 2번째 완봉승[58]

7월 12일의 대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11탈삼진으로 10년 만의 시즌 3차례 완봉승을 장식했고, 통산 203승은 당시 역대 18위의 호리우치 츠네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59] 올스타전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3회 2안타 3탈삼진 무실점의 성적[60]으로 MVP로 선정되었다.[61] 같은 해, 39세의 나이로 3번째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62] 오프의 12월 28일의 계약 갱신에서는 1900만 엔 인상된 연봉 7400만 엔(추정)으로 사인했다.[63]

코치 겸임으로 임한 다음 1990년, 4월 8일의 대오릭스 브레이브스와의 개막전(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실점 완투 승리[64]로 에가와 츠요시와 함께 통산 206승을 거두었다. 8월 24일의 대 세이부전(세이부 구장)에서는 통산 600경기 등판을 시즌 첫 완봉으로 장식했다.[66] 10월 13일의 레귤러 시즌 최종전의 대 세이부전(가와사키 구장)에서는 5회 강우 콜드 게임으로 같은 해 2번째 완봉 포함 10승을 기록하고, 10번째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67] 와카바야시 타다시 이후 41년 만, 역대 2번째로 40대에서의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고, 최종전에서의 은퇴 기념 행사 실시로 현역에서 은퇴했다.[67]

3. 1. 3. 부상과 재기

1967년 드래프트 1순위로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에이스 넘버인 "18"을 희망했지만 구단이 받아들이지 않아 "'''29'''"가 되었다. 이 "29"번은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었다.

프로 1년차인 1968년에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당시에는 드래프트 1순위 계약금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칭코나 마작 등 유흥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샘 마작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을 때, 일과인 트레이닝을 시작하려던 고야마 마사아키와 마주치게 된다. 당시 이미 베테랑이었던 고야마가 젊은 자신보다 훨씬 더 엄격한 연습을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대로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연습 중에 고야마에게 사과하러 갔을 때, "너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낭비하는 것은 슬프지 않느냐"고 타이르는 말을 들었다. 야구계를 대표하는 간판 투수의 질책과 격려에 감동한 무라타는 이후 연습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무라타의 젊은 시절 롯데에는 고야마 외에도 나리타 후미오, 키타루 마사아키, 사카이 카츠지, 카네다 토모히로 등 명투수가 있어, 무라타는 그들에게 투구술을 배웠다. 또한, 1973년부터 감독을 맡은 가네다 마사이치에게 컨디셔닝 방법을 배웠다. 타격 연습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자세를 보였던 에노모토 키하치에게도 프로 야구 선수로서 영향을 받았다.

구단명이 롯데가 된 프로 2년째인 1969년에 두각을 나타내, 시즌 6승(그 중 5승은 완봉)을 기록했다. 1970년에는 퍼시픽 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1971년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의 조언을 바탕으로 투구 폼을 대폭 개조하여, 후에 무라타의 대명사가 되는 이른바 ‘'''마사카리 투구법'''’(マサカリ投法일본어)을 완성시켰다. 그 해에 시즌 12승을 올려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74년 롯데가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을 때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6차전에서 선발 등판해 연장 10회까지 145개의 공을 던지는 등의 활약으로 승리 투수가 되면서 팀을 일본 시리즈 정상으로 이끌었다.

1976년에는 포크볼을 습득했는데 보통 평범하지 않은 긴 손가락이 낳는 날카로운 변화는 매번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게 했다. 그 해의 시즌에는 257이닝을 던져 21승을 올리는 것과 동시에 평균 자책점 1.82를 기록하여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 202개의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포수에게 의존하지 않고 ‘노 사인’으로 스스로 투구를 조절했기 때문에 1976년부터 1979년까지 4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폭투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32경기에 선발로 나와 개인 최다인 21차례 완투와 230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개막 11연승을 장식하여 시즌 19승을 기록하는 등 다승왕 타이틀도 획득해 스즈키 게이시, 야마다 히사시, 히가시오 오사무 등과 함께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투수가 됐다.

그러나 1982년에 팔꿈치에 이상이 생겨 여러 가지 치료법을 병행하였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애독했다.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정의 식수원(약수터)인 쓰즈라후치에서 좌선을 하며 심야에 흰 옷을 걸치고 폭포수를 맞으며 수행을 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오프 시즌에는 인기가 전혀 오르지 않는 롯데에 대한 불만으로 센트럴 리그의 인기 구단인 한신 타이거스의 이적을 지원했지만 맞교환에 필요한 인원이 정해지지 않아 결국 롯데에 잔류했다.[29][30] 이듬해 1983년에도 팔꿈치의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의학의 권위있는 학자로 알려진 프랭크 조브의 집도하에 왼팔의 힘줄을 오른쪽 팔꿈치에 이식하는 수술(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이후 2년 간을 재활훈련에만 전념해 1984년 시즌 종반에 복귀했다.[33]

이듬해 1985년, 개막 이후부터 11연승을 올렸다고 하는 강렬한 부활극을 선보여 최종적으론 17승 5패의 성적으로 컴백상을 수상했고 작년에 계속되는 롯데의 정규 리그 2위에 기여했다. 이 해의 개막 이후부터 11연전 11연승 기록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37] 그 해부터 6일을 쉬고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을 하게끔 됐기 때문에 ‘'''선데이 조지'''’(サンデー兆治일본어)라고도 불리게 됐다. 또한 일본 야구계에서는 오랜 세월 투수의 팔꿈치에 메스를 가하는 것은 금기시돼 있었지만 무라타의 부활에 의해 효과있는 치료법으로서 인식되게 됐다.[38][39]

1989년 5월 13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야마가타 현 야구장)에서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200승에 결정적인 수단을 동원했던 4월 1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연장 11회를 던져내면서 패전 투수가 됐지만 그 경기를 닛폰 TV가 경기 종료할 때까지 중계하였고 원래 《쇼텐》이 방송되는 17시 20분부터 17시 39분까지 시간대의 시청률은 그 날 밤 요미우리-다이요전을 웃도는 22.4%(간토 지구)를 기록했다(전체적으로는 10.9%).[57] 같은 해 39세의 나이로 통산 3번째의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석권했다. 그 다음해인 1990년, 10승을 남기면서 자신으로서는 10번째의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 와카바야시 다다시 이후 역대 2번째가 되는 40대로서의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지만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1. 4. 선데이 조지

1985년, 무라타 조지는 개막 이후부터 11연승을 올리는 강렬한 부활극을 선보였다. 최종적으로 17승 5패의 성적으로 컴백상을 수상했고, 롯데의 정규 리그 2위에 기여했다. 이 해의 개막 이후 11연전 11연승 기록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114] 그 해부터 6일을 쉬고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을 하게끔 됐기 때문에 ‘'''선데이 조지'''’(サンデー兆治일본어)라고도 불리게 됐다. 또한 일본 야구계에서는 오랜 세월 투수의 팔꿈치에 메스를 가하는 것은 금기시돼 있었지만 무라타의 부활에 의해 효과있는 치료법으로서 인식되게 됐다.[115][116]

3. 1. 5. 은퇴

1982년 팔꿈치 부상으로 여러 치료법을 시도했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를 애독하며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정에서 좌선, 폭포 수행 등을 했다. 같은 해 오프 시즌에는 한신 타이거스로의 이적을 희망했지만, 롯데와의 교환 선수가 정해지지 않아 잔류했다.[29][30] 1983년, 프랭크 조브의 집도로 왼팔 힘줄을 오른쪽 팔꿈치에 이식하는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이후 2년간 재활에 전념하여 1984년 시즌 후반에 복귀했다.[33]

1985년, 개막 이후 11연승을 기록하며 부활, 17승 5패로 컴백상을 수상했다. 롯데의 정규 리그 2위에 기여했고, 개막 이후 11연전 11연승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37] 그 해부터 일요일에만 등판하는 선발 로테이션을 하여 '선데이 조지'(サンデー兆治일본어)라고 불렸다. 일본 야구계에서 투수 팔꿈치 수술은 금기시되었지만, 무라타의 부활로 효과적인 치료법으로 인식되었다.[38][39]

1989년 5월 13일,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야마가타 현 야구장)에서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39세의 나이로 통산 3번째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62] 1990년, 10승을 기록하며 10번째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다. 와카바야시 다다시 이후 역대 2번째로 40대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 은퇴로 1960년대에 프로에 입문했던 선수들은 모두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은퇴 후

은퇴 후 NHK, 닛칸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군 투수 코치를 맡아 요시타케 신타로를 지도했다.[68] 다만 다이에 코치로 활동하던 도중 심근 경색을 앓았기 때문에 이후 코치로 활동하지 않았다.[68] 현재는 평론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일본 전국 각지(특히 크고 작은 섬들)를 돌아 소년 야구 지도에 전념하는 한편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도쿄 드림스’에 소속 선수로도 참가하고 있다.

다이에 퇴단 후에는 NHK 해설자, 닛칸 스포츠 평론가(1998년 - 2015년)를 다시 맡았다.[68] 1992년에는 초등학교 5학년 대상 도덕 교재에 "역경을 극복한 삶"의 교재로 무라타가 오른 팔꿈치 수술 후 부활한 모습이 다루어졌다.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69]

2005년 3월, 일본 프로 야구 OB 13인과 함께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 ‘쓰시마 마사카리 드림스’(対馬まさかりドリームス일본어)를 설립해 투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 팀 이름인 ‘마사카리’는 물론 현역 시절에 붙여졌던 별명에서 유래됐다. 이 팀을 이끌고 전국(특히 외딴 섬)의 소년 야구팀을 돌며 소년 야구 지도를 하고 있다. 지도에서는 꼭 팀에 소속된 초등학생 타자와 무라타와의 1대 1 대결을 펼치고 있다(무라타도 포크볼 등을 진짜로 던지고 있다). 은퇴 후 라이프워크로서 전국의 외딴 섬을 돌며 소년 야구 교실을 개최하고 있는 이유는 “일본에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외딴 섬의 수가 자신의 통산 승수(215승)와 똑같은 정도로 존재하기 때문에”라고 저서 및 인터뷰 등에서 밝힌 바 있다. 또 2007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전국 낙도 교류 중학생 야구 대회(통칭 ‘낙도 고시엔’)를 제창하고 있다.[70][71] 이 대회도 무라타의 활동을 계기로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2007년 5월 26일,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지바 롯데 마린스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경기 시작 전에 열린 시구식에서 시구자로 나왔다. 이 때의 구속은 135km/h를 기록했지만 이것은 이 경기의 선발을 맡은 와타나베 슌스케의 모든 구속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2010년 1월 2일 도쿄 돔에서 열린 ‘프로 야구 OB 올스타·애슬리트컵 센트럴·퍼시픽 대항전’에 등판, 그날 약 1개월 전에 60세가 된 직후였지만 구속 132km/h를 기록했다. 2013년 8월 30일의 지바 롯데 대 닛폰햄전에서 시구자로 나와 구속은 63세 나이에 135 km/h를 기록했다.

무라타 조지는 2022년 11월 11일 새벽, 도쿄도세타가야구세이조 자택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72][73] 화재는 목조 2층 건물 2층 부분 약 40제곱미터를 태웠으며, 무라타는 2층 실내 바닥에 앉은 채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연기를 흡입한 것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이 확인되었다.[72][73] 화재 원인은 불명이며, 큰 화상이나 외상은 없었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74] 다른 사람이 침입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74] 이웃 주민에 따르면 2층 창문 유리가 깨져 수 미터나 되는 큰 불길이 보였다고 한다.[75] 명구회 입회 자격자 중 질병 외의 원인으로 사망한 것은 무라타가 처음이었다.

무라타의 사망 소식에 지바 롯데 마린스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 가을 훈련 마지막 날 조기를 게양하고, 선수, 코치진이 그라운드에서 묵념을 올렸다.[76][77] 가와사키 구장 터에 세워진 가와사키 후지미 구기장 (후지쓰 스타디움 가와사키)의 사무소 내에 헌화대가 설치되었다.[76][77]

4. 1. 야구 해설가 및 지도자

은퇴 후 NHK, 닛칸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군 투수 코치를 맡아 요시타케 신타로를 지도했다.[68] 다만 다이에 코치로 활동하던 도중 심근 경색을 앓았기 때문에 이후 코치로 활동하지 않았다.[68] 현재는 평론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일본 전국 각지(특히 크고 작은 섬들)를 돌아 소년 야구 지도에 전념하는 한편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도쿄 드림스’에 소속 선수로도 참가하고 있다.

다이에 퇴단 후에는 NHK 해설자, 닛칸 스포츠 평론가(1998년 - 2015년)를 다시 맡았다.[68] 1992년에는 초등학교 5학년 대상 도덕 교재에 "역경을 극복한 삶"의 교재로 무라타가 오른 팔꿈치 수술 후 부활한 모습이 다루어졌다.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69]

2005년 3월, 일본 프로 야구 OB 13인과 함께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 ‘쓰시마 마사카리 드림스’(対馬まさかりドリームス일본어)를 설립해 투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 팀 이름인 ‘마사카리’는 물론 현역 시절에 붙여졌던 별명에서 유래됐다. 이 팀을 이끌고 전국(특히 외딴 섬)의 소년 야구팀을 돌며 소년 야구 지도를 하고 있다. 지도에서는 꼭 팀에 소속된 초등학생 타자와 무라타와의 1대 1 대결을 펼치고 있다(무라타도 포크볼 등을 진짜로 던지고 있다). 은퇴 후 라이프워크로서 전국의 외딴 섬을 돌며 소년 야구 교실을 개최하고 있는 이유는 “일본에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외딴 섬의 수가 자신의 통산 승수(215승)와 똑같은 정도로 존재하기 때문에”라고 저서 및 인터뷰 등에서 밝힌 바 있다. 또 2007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전국 낙도 교류 중학생 야구 대회(통칭 ‘낙도 고시엔’)를 제창하고 있다.[70][71] 이 대회도 무라타의 활동을 계기로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2007년 5월 26일, 센트럴·퍼시픽 교류전지바 롯데 마린스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경기 시작 전에 열린 시구식에서 시구자로 나왔다. 이 때의 구속은 135km/h를 기록했지만 이것은 이 경기의 선발을 맡은 와타나베 슌스케의 모든 구속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2010년 1월 2일 도쿄 돔에서 열린 ‘프로 야구 OB 올스타·애슬리트컵 센트럴·퍼시픽 대항전’에 등판, 그날 약 1개월 전에 60세가 된 직후였지만 구속 132km/h를 기록했다. 2013년 8월 30일의 지바 롯데 대 닛폰햄전에서 시구자로 나와 구속은 63세 나이에 135 km/h를 기록했다.

4. 2. 사회 공헌 활동

무라타 조지는 은퇴 후 일본방송협회(NHK), 닛칸 스포츠에서 야구 해설위원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68] 1995년부터 1997년까지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군 투수 코치를 맡아 요시타케 신타로를 지도했으나, 심근 경색으로 인해 코치직을 그만두었다.[68]

이후 평론가 활동 외에도 일본 전국 각지(특히 크고 작은 섬들)를 돌며 소년 야구 지도에 힘썼으며,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팀인 ‘도쿄 드림스’의 선수로도 활동했다. 2005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69]

2005년 3월, 일본 프로 야구 OB 13인과 함께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 ‘쓰시마 마사카리 드림스’(対馬まさかりドリームス일본어)를 설립하여 투수 겸 감독으로 취임했다.[70][71] 팀 이름 ‘마사카리’는 현역 시절 별명에서 유래했다. 이 팀을 통해 전국(특히 외딴 섬)의 소년 야구팀을 방문하여 야구 지도를 하고 있다. 은퇴 후 라이프워크로 전국의 외딴 섬을 돌며 소년 야구 교실을 개최하는 이유는 “일본에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외딴 섬의 수가 자신의 통산 승수(215승)와 똑같은 정도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2007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전국 낙도 교류 중학생 야구 대회(통칭 ‘낙도 고시엔’)를 제창했다.

1992년에는 초등학교 5학년 대상 도덕 교재에 "역경을 극복한 삶"의 교재로 무라타가 오른 팔꿈치 수술 후 부활한 모습이 다루어지기도 했다.

4. 3. 사망

무라타 조지는 2022년 11월 11일 새벽, 도쿄도세타가야구세이조 자택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72][73] 화재는 목조 2층 건물 2층 부분 약 40제곱미터를 태웠으며, 무라타는 2층 실내 바닥에 앉은 채 의식 불명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연기를 흡입한 것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이 확인되었다.[72][73] 화재 원인은 불명이며, 큰 화상이나 외상은 없었고,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74] 다른 사람이 침입했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74] 이웃 주민에 따르면 2층 창문 유리가 깨져 수 미터나 되는 큰 불길이 보였다고 한다.[75] 명구회 입회 자격자 중 질병 외의 원인으로 사망한 것은 무라타가 처음이었다.

무라타의 사망 소식에 지바 롯데 마린스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 가을 훈련 마지막 날 조기를 게양하고, 선수, 코치진이 그라운드에서 묵념을 올렸다.[76][77] 가와사키 구장 터에 세워진 가와사키 후지미 구기장 (후지쓰 스타디움 가와사키)의 사무소 내에 헌화대가 설치되었다.[76][77]

5. 플레이 스타일

무라타의 대명사인 포크볼에 대해 전 한큐 브레이브스 소속 투수였던 야마다 히사시는 “예전에 우리팀 타자에게 ‘다음은 포크볼’이라고 예고하고 실제로 포크볼을 던져 헛스윙을 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으며[118] 또한 전 난카이 호크스노무라 가쓰야는 “무라타의 포크볼의 버릇은 금방 알아챘지만(노무라에 의하면 무라타가 포크볼을 던질 때는 모션이 들어가기 전에 글러브의 안을 슬쩍 보고 있었다고 한다) 알면서도 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등 그 위력에 대한 에피소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118] 스기시타 시게루도 “나는 일본인이 던지는 포크볼은 엄밀히 말하자면 SFF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라타는 틀림없이 ‘진짜 포크볼’을 던졌었다”라고 말했다.[118]

입단 당시 도쿄 오리온스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는 같은 히로시마현 출신의 무라타를 상당히 아꼈으나 속구의 위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포크볼 연습만큼은 금지시키고 있었다.[118] 그러나 무라타는 노닌의 눈을 피해서 포크볼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다.[118] 우연히 그 모습을 노닌에게 들킨 적도 있었으나 “지금 던진 건 뭐야?”라고 물으면 ‘커브입니다’라고 얼버무렸다고 한다.[118] 그 무렵 무라타의 포크볼은 컨트롤이 나빠 실전에서의 사용이 불가능했다.[83] 여기서 당시 포크볼의 명수였던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가르침을 부탁했을 때 ‘24시간 동안 공을 쥐고 있어라’는 조언을 받아 이를 실천했다.[119] 손가락에 공을 끼운 상태에서 줄로 동여매고 자는 것으로, 포크볼 잡는 법을 몸에 익히려 한 것이다.[118] 하지만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결국 한 번 시도만 해보고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고 한다.[118]

또한 포크볼 잡는 것을 깊게 하려한 나머지 집게 손가락과 중지 사이에 나이프로 짼 적도 있다.[118] 습득한 후에도 오른손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우유병이나 주문 제작한 강철로 만든 공 사이에 끼워넣기도 하고 문을 열 때 손잡이를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끼워 여는 등 매일 같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118] 부인에 의하면 무라타가 중지와 집게 손가락으로 맥주병을 잡았을 때 부인이 떼내려고 해도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118]

통산 폭투 개수 148개는 일본 기록으로,[7] 2위(이시이 가즈히사, 115개)를 30개 이상이나 많다.[7] 이 정도의 폭투 개수를 기록한 요인은 무라타의 포크볼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도 있지만[85] 포수와 사인을 주고 받지 않고 자기 혼자서 투구를 판단했었기 때문에 언제 포크볼이 날아 올지 포수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118] 무라타 자신은 이 정도의 폭투 개수에도 불구하고 폭투에 의한 실점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이 기록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118]

독특한 투구폼은 투구 동작이 길었던 탓인지 공을 잡은 손모양을 확인하기가 쉬웠다고 하여 상대 팀의 3루 코치가 무라타의 공 잡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공을 끼우고 있었을 때는 휘파람을 불어서 타자에게 알리는 등 타자가 노리고 칠 수 있게끔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난카이 호크스의 돈 블레이저 등).[118]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린 무라타는 투구 모션 중에 직구에서 포크볼, 포크볼에서 직구로 공 잡는 손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투구법을 고안하여 휘파람 작전을 봉쇄하였다.[118]

선발 로테이션 투수로서의 기용이 많았지만 속구와 포크볼을 살리기 위해 감독인 가네다 마사이치의 의향에 따라 두 차례 정도 구원 투수진으로 갔던 적도 있다.[120] 선수 생활 말기에도 한 차례만 구원으로 가서 그 후 다시 선발로 돌아왔지만 본인은 이것에 대해 “그것은 내 주의주장보다도 허벅지 등 하반신이 등판 간격이 짧은 구원 투수에게는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선발로 돌아왔다”라고 말했다.[120] 본인도 선발 완투에 대한 강한 고집이 은퇴의 이유로 이 같은 고집을 플레이에서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꼽았다.[120] 은퇴 후에도 좌우명은 ‘인생 선발 완투’이며, 사인에도 써 넣기도 했다.[120]

오랫동안 상대 역할을 맡은 하카마다 히데토시가 신인 시절 무라타는 “1아웃, 주자 만루. 이 때 확실히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118] 하카마다는 망설임 없이 “병살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럼, 그 다음은?”이라고 물어와 대답하는데는 난처했다.[118] 무라타는 웃으면서 “가장 좋은 것은 삼진이다. 병살은 실책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118] 무라타가 탈삼진을 고집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화이다.[118]

무라타의 투구 폼은 왼쪽 다리를 지면과 수평으로 높게 들어올린 후 크게 내딛고, 오른팔을 힘차게 휘두르는 독특한 오버스로로, 그 동작이 자귀를 내리치는 모습에 비유되어 "마사카리 투구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80]。왼쪽 다리를 들어올리는 동안 엉덩이를 타자에게 크게 내밀고, 오른손을 오른쪽 허벅지 부근까지 내려 전신에 힘을 모았다가 던지기 때문에, 타자에게 공의 그립을 노출하기 쉬운 단점이 있었지만,[81] 무라타는 이 투구법을 입단 4년차에 완성[81]시킨 이후 은퇴할 때까지 관철했으며[82], 은퇴 후에도 2020년 시점까지 이 투구 폼을 유지했다.

현역 시절부터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은퇴 후에도 구속 유지를 위해 오랫동안 계속해왔고, 훈련량에 관한 일화는 매우 많다.[118] 현역 말년, 1년 동안 같은 시기에 소속되었던 고미야마 사토루는, "1년 동안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엄청난 훈련을 하는데, 우리 젊은 선수들이 뛰는 것을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 아, 이런 사람이 정말 있구나, 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소감을 말했다 (2013년 8월 30일 지바 롯데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시구식 때의 실황에서).[118]

은퇴의 1990년 시즌, 히로시마에서 이적해 캠프에서 연습 파트너를 맡았던 시라타케 요시히사에 따르면, 무라타는 워밍업부터 90m의 원투를 가볍게 해내 놀랐다고 한다.[87] 또한 무라타로부터 '내 글러브에는 1kg의 철판이 들어있다'고 밝혀져, 실물을 보여주자 철판은 글러브의 엄지 부분에 들어있었고, 연습에서도 시합에서도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 던졌다고 한다[87]

"외톨이"로, 현역 시대에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11]

5. 1. 투구 폼

무라타 조지의 투구 폼은 왼쪽 다리를 지면과 수평으로 높게 들어올린 후 크게 내딛고, 오른팔을 힘차게 휘두르는 독특한 오버스로였다. 그 동작이 자귀를 내리치는 모습에 비유되어 "마사카리 투구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80] 왼쪽 다리를 들어올리는 동안 엉덩이를 타자에게 크게 내밀고, 오른손을 오른쪽 허벅지 부근까지 내려 전신에 힘을 모았다가 던지기 때문에, 타자에게 공의 그립을 노출하기 쉬운 단점이 있었다.[81] 하지만 무라타는 이 투구법을 입단 4년차에 완성시킨 이후 은퇴할 때까지 관철했으며,[82] 은퇴 후에도 2020년 시점까지 이 투구 폼을 유지했다.

무라타는 포크볼의 명수로도 알려져 있다. 전 한큐 브레이브스의 야마다 히사시는 "예전에 우리 타자에게 '다음, 포크'라고 예고하고 실제로 포크를 던져 헛스윙하게 했다"고 증언했고, 전 난카이 호크스의 노무라 가쓰야는 "무라타의 포크볼의 버릇은 금방 알았지만 알고 있어도 칠 수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스기시타 시게루 역시 "일본인 투수가 던지는 포크볼은 엄밀히 말하면 SFF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무라타 군은 틀림없이 '진짜 포크볼'을 던졌다"라고 평가했다.[118]

입단 당시 도쿄 오리온스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는 속구의 위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포크볼 연습을 금지했지만, 무라타는 몰래 연습을 계속했다. 당시 컨트롤이 좋지 않았던[83] 무라타는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조언을 구했고, "24시간 공을 쥐고 있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119] 손가락에 공을 낀 채 끈으로 묶고 자는 방법을 시도했으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포기했다. 또한 포크볼 그립을 깊게 하기 위해 집게손가락과 중지 사이에 칼로 틈을 내기도 했다. 습득 후에도 꾸준히 손가락 사이를 단련했는데, 부인에 따르면 무라타가 맥주병을 손가락으로 잡으면 떼어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무라타는 통산 폭투 148개로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 이는 포크볼의 위력[85] 외에도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지 않고 스스로 투구를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폭투에 의한 실점이 적어 이 기록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독특한 투구 폼 때문에 3루 코치가 공의 그립을 보고 타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무라타는 투구 모션 중에 그립을 바꾸는 방법으로 이를 봉쇄했다.

선발 로테이션 투수로 주로 활약했지만,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의 의향에 따라 구원 투수로 등판한 적도 있다. 선수 생활 말기에도 구원 등판 후 다시 선발로 복귀했는데, 이는 하반신이 구원 투수의 짧은 등판 간격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무라타는 선발 완투에 대한 강한 고집이 있었고, 이를 실현할 수 없게 된 것을 은퇴 이유로 꼽았다. 은퇴 후에도 그의 좌우명은 '인생 선발 완투'이다.[120]

현역 시절부터 엄청난 훈련량을 소화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은퇴 후에도 구속 유지를 위해 훈련을 계속했다. 특히, 1990년 시즌에 함께했던 시라타케 요시히사는 무라타가 워밍업부터 90m 원투를 가볍게 해내는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또한 무라타의 글러브에는 1kg의 철판이 들어있었다고 한다.[87]

오랫동안 배터리를 이룬 하카마다 히데토시는 신인 시절 무라타에게 "1아웃 주자 만루 상황에서 어떻게 막는 것이 가장 좋은가"라는 질문을 받았고, "병살"이라고 답했지만, 무라타는 "가장 좋은 것은 삼진"이라고 말했다. 이는 무라타가 탈삼진을 고집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5. 2. 구종

무라타 조지의 대명사는 포크볼이다. 전 한큐 브레이브스 소속 투수였던 야마다 히사시는 "예전에 우리팀 타자에게 ‘다음은 포크볼’이라고 예고하고 실제로 포크볼을 던져 헛스윙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118]난카이 호크스노무라 가쓰야는 "무라타의 포크볼의 버릇은 금방 알아챘지만 알면서도 칠 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등 포크볼의 위력에 대한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118] 스기시타 시게루는 "일본인이 던지는 포크볼은 엄밀히 말하자면 SFF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라타는 틀림없이 ‘진짜 포크볼’을 던졌었다"라고 말했다.[118]

입단 당시 감독이었던 노닌 와타루는 속구의 위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포크볼 연습을 금지시켰으나, 무라타는 몰래 연습을 계속했다.[118] 당시 포크볼의 명수였던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가르침을 부탁했을 때 ‘24시간 동안 공을 쥐고 있어라’는 조언을 받아 이를 실천했으나,[119]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한 번 시도만 해보고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118] 또한 포크볼 잡는 것을 깊게 하려한 나머지 집게 손가락과 중지 사이에 나이프로 짼 적도 있다.[118] 습득 후에도 오른손 중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에 우유병이나 주문 제작한 강철로 만든 공 사이에 끼워넣는 등 매일 같이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118]

통산 폭투 개수 148개는 일본 기록으로,[7] 이 정도의 폭투 개수를 기록한 요인은 무라타의 포크볼이 너무나 예민했던 것도 있지만 포수와 사인을 주고 받지 않고 자기 혼자서 투구를 판단했었기 때문에 포수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118][85] 무라타 자신은 폭투에 의한 실점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이 기록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118]

독특한 투구폼은 투구 동작이 길었던 탓인지 공을 잡은 손모양을 확인하기가 쉬웠다고 한다.[118] 상대 팀의 3루 코치가 무라타의 공 잡는 것을 보고 손가락으로 공을 끼우고 있었을 때는 휘파람을 불어서 타자에게 알리는 등 타자가 노리고 칠 수 있게끔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난카이 호크스의 돈 블레이저 등).[118]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린 무라타는 투구 모션 중에 직구에서 포크볼, 포크볼에서 직구로 공 잡는 손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투구법을 고안하여 휘파람 작전을 봉쇄하였다.[118]

선발 로테이션 투수로서의 기용이 많았지만 속구와 포크볼을 살리기 위해 감독인 가네다 마사이치의 의향에 따라 두 차례 정도 구원 투수진으로 갔던 적도 있다.[120] 본인은 “그것은 내 주의주장보다도 허벅지 등 하반신이 등판 간격이 짧은 구원 투수에게는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선발로 돌아왔다”라고 말했다.[120] 본인도 선발 완투에 대한 강한 고집이 은퇴의 이유로 이 같은 고집을 플레이에서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꼽았다.[120] 은퇴 후에도 좌우명은 ‘인생 선발 완투’이며, 사인에도 써 넣기도 했다.[120]

오랫동안 상대 역할을 맡은 하카마다 히데토시가 신인 시절 무라타는 “1아웃, 주자 만루. 이 때 확실히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물었고, 무라타는 “가장 좋은 것은 삼진이다. 병살은 실책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118]

5. 3. 탈삼진에 대한 집념

무라타 조지는 현역 시절 탈삼진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였다. 신인 시절 포수 하카마다 히데토시에게 "1아웃 주자 만루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게 막는 방법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고, 하카마다가 병살이라고 답하자 "가장 좋은 것은 삼진이다. 병살은 실책이 있을 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탈삼진에 대한 집념을 드러냈다.[120]

포크볼의 명수였던 무라타는 야마다 히사시, 노무라 가쓰야, 스기시타 시게루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특히 스기시타 시게루는 "나는 일본인이 던지는 포크볼은 엄밀히 말하자면 SFF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라타는 틀림없이 ‘진짜 포크볼’을 던졌었다"라고 평가했다.[80]

노닌 와타루 감독은 포크볼 연습을 금지했지만, 무라타는 몰래 연습을 계속했다.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조언을 구해 24시간 동안 공을 쥐고 있는 연습을 하기도 했고, 손가락 사이에 칼로 틈을 내기도 했다. 습득 후에도 우유병이나 강철로 만든 공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는 등 끊임없이 연습했다.[118][119]

통산 148개의 폭투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이는 포크볼의 위력뿐만 아니라,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지 않고 스스로 투구를 결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7] 하지만 무라타는 폭투로 인한 실점이 적었기 때문에 이 기록에 자부심을 가졌다.[85]

상대 팀 3루 코치가 공 잡는 것을 보고 타자에게 구종을 알리는 것을 역이용하여 투구 모션 중에 직구와 포크볼의 그립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투구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6. 에피소드


  • ‘인생 선발 완투’(人生先発完投일본어)를 좌우명으로 삼고 선발 완투를 고집했던 거칠어진 야구인생은 ‘쇼와 태생의 메이지 남자’라고 불렸다.[121]
  • 일생의 라이벌은 가도타 히로미쓰였는데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가지고 던질 수 있었던 공은 안타를 맞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던 슬라이더를 가도타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는 바람에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가도타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하나도 던지지 않고 직구를 연마하게 됐다. 한편 가도타는 직구에 지지 않기 위해 강철로 만든 공을 치는 연습에만 힘써 그것을 들은 무라타는 좀더 직구를 연마하게끔 단련을 계속했다고 한다.[121]
  • 1992년, 초등학교 5학년의 도덕 교재에 ‘역경을 극복한 인생의 삶’의 교재로서 무라타가 오른쪽 팔꿈치 수술에서 부활했을 때의 모습이 소개되었다.
  • 마스터스 리그 등에서 지금까지도 구속 140km/h에 달하는 직구와 낙차 20cm의 포크볼을 선보여 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것에 대해 무라타는 어린이들에게 진정한 프로의 공을 보여 ‘프로란 대단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한 거라고 말했다. TV 프로그램 《난다!?》에서는 초등학생과 진검 승부를 하거나 후루타 아쓰야(당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선수 겸임 감독)를 타석에 세우고 승부하는 등(그런 후루타에게‘우리 팀에 입단을 원한다’라고 말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 실력은 녹슬줄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기자로부터 “지금이라도 1이닝 뿐이라면 프로에서도 통용되진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선발 아니면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무라타 본인은 “마스터스 리그에서 140km/h를 던질 수 없게 된다면 이제 공을 잡는 것은 그만두겠다”라고 말했다. ‘무라타의 등판’은 마스터스 리그의 명물로 손꼽아 무라타가 강판하면 관객도 야구장을 빠져나갈 준비를 시작하는 광경도 목격됐다.
  • 현역을 은퇴한 지 약 20년, 60세를 넘기고도 여전히 매일 스포츠 센터에 다니면서 ‘초인 트레이닝’[122]으로 불리는 혹독한 트레이닝을 하고 있다. 내용은 팔굽혀펴기를 500회, 복근·배근 운동을 1000회씩, 머신에 의한 트레이닝 외에 아령을 오른손 집게 손가락과 중지에 끼우는 포크볼을 던지는 형태로 쥔 후 위아래로 움직이는 운동들로써 천천히 시간을 걸쳐서 하는 것이 아닌 맹렬한 스피드로 단번에 한다. 마스터스 리그에서 함께한 후배 미야모토 가즈토모 등은 처음 무라타의 트레이닝을 보고 경악했다고 말한다. 또한 굉장히 유연한 몸을 유지하고 있어 2009년 몰츠 드림 매치에서 피칭을 끝낸 미야모토에 의한 인터뷰에서 “투수에게 중요한 것은 고관절(의 부드러움)”이라고 말하는 등 다리를 벌려 몸을 앞으로 숙인 뒤 가슴을 바닥에 닿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근육 트레이닝 뿐만이 아닌 유연 체조도 매일 하고 있었다.
  • 아내 슈코는 전 항공사 그라운드 스태프 출신으로, 단기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어학원도 다녀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88]。무라타가 오른쪽 팔꿈치 치료와 그 이후의 진찰을 위해 미국에 건너갈 때 동행하여 통역을 맡았다. 무라타의 오른쪽 팔꿈치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무라타와 함께 전국에 있는 명의라고 불리는 병원을 찾아다니며 무라타를 격려했다. 그 당시의 모습이 1986년 TV 아사히 계열의 월요 와이드 극장에서 "선데이 조지의 아내"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되어 방영되었다. 무라타 역에는 나다카 타츠로, 아내 슈코 역에는 호시노 토모코가 캐스팅되었으며, 이나오 카즈히사와 오치아이 히로미츠도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남동생이 있다[89]
  • 가네다 마사이치와는 1973년 지프시 로테 시대에 돌입하여 종료된 1978년, 그리고 1990년에 롯데 오리온즈의 감독과 선수라는 관계였지만, 무라타는 가네다를 은사로 숭배했고, 가네다는 무라타를 아끼는 제자로 여겨 사제 관계였다. 만남의 계기는 무라타가 프로 2년차 때의 이부스키 캠프에서, 가네다가 현역 은퇴 직후 평론가로서 취재를 왔을 때 불펜에서 투구 연습을 하던 무라타에게 "너, 좋은 투수가 될 거야"라고 말을 건 것이었다[90]。무라타는 선수 시절의 가네다를 생생하게 알고 있었고, 위대한 실적을 남긴 대선배의 한마디에 용기를 얻는 기분이 들어 불안감이 자신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네다는 롯데 감독 취임 후, 투수로서의 "준비의 중요성"을 배우고 은퇴할 때까지 선발·완투를 고수했는데, 무라타는 이를 가네다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가네다 또한 197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무라타를 적극 기용했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눈앞에 둔 6차전에서는 선발로 기용하는 등 무라타에게 큰 신뢰를 보였다. 가네다는 2019년 10월 6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가네다 본인의 생전 희망[91]에 따라, 10월 13일에 치러진 가네다의 장례식에서 무라타가 조사를 낭독했다.

7.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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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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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는 NPB 역대 최고
  • 도쿄(東京)는, 1969년에 롯데(ロッテ)로 구단명을 변경
  • '''29''' (1968년 - 1990년)
  • '''81''' (1995년 - 1997년)


; 타이틀

; 수상

  • 베스트 나인: 1회(1981년)
  • 전·후기 MVP: 2회(1977년 후기, 1981년 전기)
  • 월간 MVP: 1회(1981년 4월)
  • 컴백상(1985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1974년)
  • 올스타전 MVP: 1회(1989년 1차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MVP: 1회(1974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감투상: 1회(1981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05년)
  • 도민 문화영예상(1990년)
  • 신어·유행어 대상 특별 부문 인어 일체·어록상 (1990년, "쇼와 시대에 태어난 메이지 남자", 아내와 공동 수상)
  • 베스트 파더 옐로우 리본상 (1994년)
  • HEROs AWARD 2021 남성 부문 (2021년)


; 첫 기록

  • 첫 등판: 1968년 10월 8일, 대 난카이 호크스 27차전(오사카 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3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5회말에 미우라 기요히로로부터[100]
  • 첫 선발·첫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69년 5월 23일, 대 난카이 호크스 9차전(오사카 구장)[101]
  • 첫 세이브: 1974년 9월 19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12차전(오사카 구장), 8회말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이닝 무실점
  • 첫 홈런: 1971년 8월 22일, 난카이 호크스 22회전(오사카 스타디움), 와타나베 타이수케로부터(통산 유일)


;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0탈삼진: 1977년 9월 27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2차전(니시쿄고쿠 구장), 6회말에 시마타니 긴지로부터 ※역대 54번째[100]
  • 통산 100승: 1978년 5월 12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8차전(가와사키 구장), 9이닝 3실점(2자책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73번째[101]
  • 통산 100선발승: 1979년 10월 10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3차전(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9이닝 2실점으로 완투 승리
  • 통산 1500탈삼진: 1980년 6월 22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11차전(가와사키 구장), 5회초에 구보데라 유지로부터 ※역대 28번째[102]
  • 통산 150승: 1981년 8월 6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후기 6차전(미야기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35번째[103]
  • 통산 150선발승: 1986년 5월 2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7차전(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9이닝 1실점으로 완투 승리
  • 통산 500경기 등판: 1986년 6월 1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9차전(가와사키 구장), 선발 등판으로 7과 1/3이닝 2실점(1자책점) ※역대 57번째[104]
  • 통산 2000탈삼진: 1987년 9월 20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22차전(가와사키 구장), 3회초에 이시게 히로미치로부터 ※역대 13번째[48]
  • 통산 200승: 1989년 5월 13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7차전(야마가타현 야구장), 9이닝 5실점 완투 승리 ※역대 20번째[55]
  • 통산 600경기 등판: 1990년 8월 24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6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27번째[105]


; 기타

  • 통산 폭투는 148개로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 1경기 16 탈삼진: 1979년 6월 8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전기 9차전(닛폰 생명 구장)
  • 1경기 3개 폭투: 3회(1987년 5월 28일, 1987년 6월 14일, 1990년 5월 15일)
  • 1이닝 3개 폭투: 1987년 6월 14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1차전(나고야 구장)
  • 개막전 선발 투수: 13회(1975년 ~ 1982년, 1986년 ~ 1990년)
  • 올스타전 출장: 13회(1971년, 1974년 ~ 1981년, 1985년, 1986년, 1988년, 1989년)
  • 4 디케이드 플레이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개의 시대를 걸쳐 활약 ※역대 4번째, 투수로는 역대 최초

7. 1. 수상 및 타이틀 경력

7. 1. 1. 타이틀


  • 다승왕: 1회(1981년)
  • 최우수 평균 자책점: 3회(1975년, 1976년, 1989년)
  • 최다 세이브 투수: 1회(1975년)
  •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4회(1976년, 1977년, 1979년, 1981년)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최다승: 1회 (1981년[24])
  • 최우수 방어율: 3회 (1975년[92], 1976년[22], 1989년[62])
  • 최다 탈삼진: 4회 (1976년, 1977년, 1979년, 1981년) ※당시 연맹 표창 없음, 퍼시픽 리그에서는 1989년부터 표창
  • 최다 세이브 투수: 1회 (1975년[92])

7. 1. 2. 수상


  • 베스트 나인: 1회(1981년)
  • 전·후기 MVP: 2회(1977년 후기, 1981년 전기)
  • 월간 MVP: 1회(1981년 4월)
  • 컴백상(1985년)
  •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1974년)
  • 올스타전 MVP: 1회(1989년 1차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MVP: 1회(1974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감투상: 1회(1981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2005년)
  • 도민 문화영예상(1990년)
  • 신어·유행어 대상 특별 부문 인어 일체·어록상 (1990년, "쇼와 시대에 태어난 메이지 남자", 아내와 공동 수상)
  • 베스트 파더 옐로우 리본상 (1994년)
  • HEROs AWARD 2021 남성 부문 (2021년)

7. 2. 개인 기록

; 첫 기록

  • 첫 등판: 1968년 10월 8일, 대 난카이 호크스 27차전(오사카 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3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5회말에 미우라 기요히로로부터[100]
  • 첫 선발·첫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69년 5월 23일, 대 난카이 호크스 9차전(오사카 구장)[101]
  • 첫 세이브: 1974년 9월 19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12차전(오사카 구장), 8회말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이닝 무실점
  • 첫 홈런: 1971년 8월 22일, 난카이 호크스 22회전(오사카 스타디움), 와타나베 타이수케로부터(통산 유일)


;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0탈삼진: 1977년 9월 27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2차전(니시쿄고쿠 구장), 6회말에 시마타니 긴지로부터 ※역대 54번째[100]
  • 통산 100승: 1978년 5월 12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8차전(가와사키 구장), 9이닝 3실점(2자책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73번째[101]
  • 통산 100선발승: 1979년 10월 10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3차전(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9이닝 2실점으로 완투 승리
  • 통산 1500탈삼진: 1980년 6월 22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11차전(가와사키 구장), 5회초에 구보데라 유지로부터 ※역대 28번째[102]
  • 통산 150승: 1981년 8월 6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후기 6차전(미야기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35번째[103]
  • 통산 150선발승: 1986년 5월 2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7차전(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9이닝 1실점으로 완투 승리
  • 통산 500경기 등판: 1986년 6월 1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9차전(가와사키 구장), 선발 등판으로 7과 1/3이닝 2실점(1자책점) ※역대 57번째[104]
  • 통산 2000탈삼진: 1987년 9월 20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22차전(가와사키 구장), 3회초에 이시게 히로미치로부터 ※역대 13번째[48]
  • 통산 200승: 1989년 5월 13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7차전(야마가타현 야구장), 9이닝 5실점 완투 승리 ※역대 20번째[55]
  • 통산 600경기 등판: 1990년 8월 24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6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27번째[105]


; 기타

  • 통산 폭투는 148개로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 1경기 16 탈삼진: 1979년 6월 8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전기 9차전(닛폰 생명 구장)
  • 1경기 3개 폭투: 3회(1987년 5월 28일, 1987년 6월 14일, 1990년 5월 15일)
  • 1이닝 3개 폭투: 1987년 6월 14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1차전(나고야 구장)
  • 개막전 선발 투수: 13회(1975년 ~ 1982년, 1986년 ~ 1990년)
  • 올스타전 출장: 13회(1971년, 1974년 ~ 1981년, 1985년, 1986년, 1988년, 1989년)
  • 4 디케이드 플레이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개의 시대를 걸쳐 활약 ※역대 4번째, 투수로는 역대 최초

7. 2. 1. 첫 기록


  • 첫 등판: 1968년 10월 8일, 대 난카이 호크스 27차전(오사카 구장), 5회말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 3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5회말에 미우라 기요히로로부터[100]
  • 첫 선발·첫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69년 5월 23일, 대 난카이 호크스 9차전(오사카 구장)[101]
  • 첫 세이브: 1974년 9월 19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12차전(오사카 구장), 8회말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2이닝 무실점
  • 첫 홈런: 1971년 8월 22일, 난카이 호크스 22회전(오사카 스타디움), 와타나베 타이수케로부터(통산 유일)

7. 2. 2. 기록 달성 경력


  • 통산 1000탈삼진: 1977년 9월 27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2차전(니시쿄고쿠 구장), 6회말에 시마타니 긴지로부터 ※역대 54번째[100]
  • 통산 100승: 1978년 5월 12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8차전(가와사키 구장), 9이닝 3실점(2자책점)으로 완투 승리 ※역대 73번째[101]
  • 통산 100선발승: 1979년 10월 10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후기 13차전(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9이닝 2실점으로 완투 승리
  • 통산 1500탈삼진: 1980년 6월 22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11차전(가와사키 구장), 5회초에 구보데라 유지로부터 ※역대 28번째[102]
  • 통산 150승: 1981년 8월 6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후기 6차전(미야기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35번째[103]
  • 통산 150선발승: 1986년 5월 2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7차전(한큐 니시노미야 스타디움), 9이닝 1실점으로 완투 승리
  • 통산 500경기 등판: 1986년 6월 1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9차전(가와사키 구장), 선발 등판으로 7과 1/3이닝 2실점(1자책점) ※역대 57번째[104]
  • 통산 2000탈삼진: 1987년 9월 20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22차전(가와사키 구장), 3회초에 이시게 히로미치로부터 ※역대 13번째[48]
  • 통산 200승: 1989년 5월 13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7차전(야마가타현 야구장), 9이닝 5실점 완투 승리 ※역대 20번째[55]
  • 통산 600경기 등판: 1990년 8월 24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6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9이닝 완봉 승리 ※역대 27번째[105]
  • 첫 등판: 1968년 10월 8일, 난카이 호크스 27회전(오사카 스타디움), 5회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3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상동, 5회말 미우라 키요히로로부터[100]
  • 첫 선발·첫 승리·첫 완투승·첫 완봉승: 1969년 5월 23일, 난카이 호크스 7회전(오사카 스타디움)[101]
  • 첫 세이브: 1974년 9월 19일, 난카이 호크스 후기 12회전(오사카 스타디움), 8회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2이닝 무실점
  • 첫 홈런: 1971년 8월 22일, 난카이 호크스 22회전(오사카 스타디움), 와타나베 타이수케로부터(통산 유일)
  • 1경기 16 탈삼진: 1979년 6월 8일, 킨테츠 버팔로스 전기 9회전(니세이 구장)
  • 1경기 3 폭투: 3회 (1987년 5월 28일, 1987년 6월 14일, 1990년 5월 15일)
  • 1이닝 3 폭투: 1987년 6월 14일, 킨테츠 버팔로스 11회전(나고야 구장)
  • 통산 148 폭투(프로 야구 기록)
  • 개막전 선발 투수: 13회 (1975년 - 1982년, 1986년 - 1990년)
  • 올스타전 출장: 13회 (1971년, 1974년 - 1981년, 1985년 - 1986년, 1988년 - 1989년)
  • 4 디케이드 플레이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개의 시대를 걸쳐 활약 ※역대 4번째, 투수로는 역대 최초

7. 2. 3. 기타


  • 통산 폭투는 148개로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 1경기 16 탈삼진: 1979년 6월 8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전기 9차전(닛폰 생명 구장)
  • 1경기 3개 폭투: 3회(1987년 5월 28일, 1987년 6월 14일, 1990년 5월 15일)
  • 1이닝 3개 폭투: 1987년 6월 14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11차전(나고야 구장)
  • 개막전 선발 투수: 13회(1975년 ~ 1982년, 1986년 ~ 1990년)
  • 올스타전 출장: 13회(1971년, 1974년 ~ 1981년, 1985년, 1986년, 1988년, 1989년)
  • 4 디케이드 플레이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4개의 시대를 걸쳐 활약 ※역대 4번째, 투수로는 역대 최초

8. 각주

참조

[1] 서적 You Gotta Have Wa Vintage Departures 1989
[2] 웹사이트 The Pain Of Perfection http://vault.sportsi[...] 1989-05-15
[3] 뉴스 Hall of Fame pitcher Murata pays tribute to Dr. Jobe https://www.japantim[...] 2021-02-18
[4] 뉴스 村田兆治容疑者、逮捕 空港で暴行も容疑否認 携帯電話を手に金属探知ゲートへ→何度も引っかかり… https://news.yahoo.c[...] 2022-09-24
[5] 웹사이트 元プロ野球投手の村田兆治さん、自宅火災で死亡 https://www.yomiuri.[...] 2022-11-11
[6] 웹사이트 村田兆治氏、火災死 球界ショック…暴行事件からわずか2カ月 「マサカリ投法」で人気 https://www.sponichi[...] 스포츠니폰 2022-11-12
[7] 웹사이트 村田兆治、石井一久、新垣渚…通算100回到達はわずかに3人。意外と知らない「暴投」の歴代記録 https://column.sp.ba[...] 베이스볼・매거진사 2021-10-27
[8] 서적 永久保存版・日本プロ野球名投手100人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89
[9] 뉴스 스포츠니폰我が道 村田兆治、2017年7月5日 스포츠니폰 2017-07-05
[10] 뉴스 스포츠니폰我が道 村田兆治、2017年7月6日 스포츠니폰 2017-07-06
[11] 간행물 週現『熱討スタジアム』「マサカリ投法」村田兆治を語ろう 袴田英利×福本豊×植村義信
[12] 뉴스 お家芸"大逆転"で中日先勝 高木守、劇的サヨナラ ロッテ 木樽、村田継投及ばず 北海道新聞 1974-10-17
[13] 뉴스 ロッテ 猛打でタイに 渋谷に連続アーチ 村田好救援、中日ふり切る 北海道新聞 1974-10-21
[14] 뉴스 ロッテ、24年ぶりの日本一 当たり屋弘田、決勝打 延長10回村田完投 中日、大島悪役命取り 北海道新聞 1974-10-24
[15] 뉴스 シリーズ表彰選手 北海道新聞 1974-10-24
[16] 뉴스 ロッテ、江夏に2発 村田、初完封で3勝目 読売新聞 1976-04-30
[17] 뉴스 村田が完封 ロッテ、初戦に快勝 北海道新聞 1976-07-03
[18] 뉴스 抜けガラ阪急 はつらつロッテ 読売新聞 1976-07-26
[19] 뉴스 村田が4安打完封 パ天王山、ロッテ5連勝 読売新聞 1976-08-05
[20] 뉴스 ロッテ0.5差に肉薄 村田、南海を5安打完封 読売新聞 1976-09-03
[21] 뉴스 村田、4連続完投で初の20勝目 読売新聞 1976-09-11
[22] 뉴스 パの全日程終わる 読売新聞 1976-10-14
[23] 뉴스 マジック目前 ロッテ高笑い 勇者突き放す 山田強襲(第一)村田11連勝(第二) 北海道新聞 1981-06-08
[24] 뉴스 パ・リーグ 全日程終了 7日から"日・ロ決戦" 北海道新聞 1981-10-05
[25] 뉴스 村田、踏んばり完投 打線も18長短打の援護 北海道新聞 1982-04-04
[26] 뉴스 村田(ロッテ)完封で2勝目 西武打線を散発5安打 北海道新聞 1982-04-09
[27] 뉴스 村田が2連続完封 北海道新聞 1982-04-14
[28] 뉴스 村田「右ひじ痛い」 北海道新聞 1982-04-22
[29] 서적 粘着!プロ野球むしかえしニュース 宝島社 2013
[30] 웹사이트 【12月13日】1982年(昭57) 村田兆治、セへ移籍志願もオーナー一蹴 引退騒動へ https://web.archive.[...]
[31] 뉴스 スワッ村田(ロッテ)争奪戦 中日 熱烈コール 色めくセ5球団、年末大騒動 交換要員に大物の名 中日新聞社 1982-12-10
[32] 뉴스 ロッテ重光オーナーが断 村田は出さん 屈服か任意引退か 追い詰められたパの看板投手 ”わがまま男で内乱” 『よう使わぬ』と山本監督 中日新聞社 1982-12-14
[33] 웹사이트 村田兆治氏「ジョーブ博士がいなければ仏料理店経営してた」 https://www.news-pos[...]
[34] 뉴스 村田 気迫の復活 3年ぶり完投勝ち 故障を克服 熱投155球 北海道新聞 1985-04-15
[35] 웹사이트 【4月14日】1985年(昭60) 男泣きした村田兆治 クールな主砲は熱い思いで応えた https://www.sponichi[...]
[36] 뉴스 兆治、久びさ日曜登板 自己タイ11連勝 北海道新聞 1985-07-08
[37] 웹사이트 オリ・西、開幕7戦7勝!昨年のマー君より凄いゆうちゃん http://www.sanspo.co[...]
[38] 문서 日本で初めてトミー・ジョン手術を受けたのは村田の後輩である[[三井雅晴]]だが、三井は以前の球威を取り戻せず引退を余儀なくされていた。
[39] 문서 後には[[桑田真澄]]などが肘の手術を受けて復帰している。
[40] 뉴스 村田、KOにも強気 北海道新聞 1986-04-07
[41] 뉴스 巧みな配当で完投 落合には2ラン食う 北海道新聞 1986-04-07
[42] 뉴스 東尾が巧投 ロッテかわす 北海道新聞 1986-05-12
[43] 뉴스 サンデー兆治 トンネル脱出 阪急、首位転落 北海道新聞 1986-05-26
[44] 뉴스 球界ルポ 19日 村田は100万円減 読売新聞 1986-12-20
[45] 뉴스 真喜志 勝ち越し3ラン 有藤ロッテ 村田崩れる 北海道新聞 1987-04-11
[46] 뉴스 有藤・ロッテ両目 勇者殺し 村田5年ぶり完封 北海道新聞 1987-04-20
[47] 뉴스 "サンデー兆治" 釧路で快腕 猛牛打線を完封 6年ぶり無四球 水上も祝砲 北海道新聞 1987-07-06
[48] 뉴스 村田"手負い"の二千奪三振 固め打ちレオ快勝 東尾は無四球完投 北海道新聞 1987-09-21
[49] 뉴스 球界ルポ 15日 ロッテ・村田、2%増で更改 読売新聞 1987-12-16
[50] 뉴스 村田、年輪の初勝利 西崎は2連続押し出し 日ハムも初戦落とす 読売新聞 1988-04-09
[51] 뉴스 村田、完封で無傷3連勝 200勝へあと「9」 藤本修3安打好投フイ 読売新聞 1988-04-25
[52] 뉴스 村田、200勝へあと2 愛甲、決勝の16号2ラン 北海道新聞 1988-10-04
[53] 뉴스 「欲もあるが、満足しなければ」 村田、"不惑"の5500万 読売新聞 1988-12-13
[54] 뉴스 39歳149球開幕初完封 村田200勝あと「1」 146キロ剛球"秋山封じ" 読売新聞 1989-04-10
[55] 뉴스 村田 苦難超え200勝 東尾以来5年ぶり21人目 ロッテナイン懸命の逆転援護 122球完投 上川3ラン、森田がV打 読売新聞 1989-05-14
[56] 뉴스 村田182球も200勝逃す 39歳にも快記録への重圧 惜しい序盤の失点 延長11回力尽きる 読売新聞 1989-04-17
[57] 웹사이트 プロ野球高世帯視聴率番組 http://www.videor.co[...] [[비데오리서치]] 2009-10-06
[58] 뉴스 "壁"越えたらスイスイと 村田、完封202勝 読売新聞 1989-06-29
[59] 뉴스 村田203勝 歴代18位 堀内と並んだ 11三振、10年ぶり完封3 読売新聞 1989-07-13
[60] 뉴스 最年長白星 村田 MVP 全パ完封リレー 阿波野 牛島 渡辺久 全セ3安打9三振 三塁踏めず 読売新聞 1989-07-26
[61] 뉴스 表彰選手 読売新聞 1989-07-26
[62] 뉴스 パ全日程終了 井上、初セーブ王 熱闘に4年連続観客増 読売新聞 1989-10-21
[63] 뉴스 球界情報 28日 村田7千4百万 「"超える"」をテーマに 読売新聞 1989-12-29
[64] 뉴스 村田 不惑の開幕勝利 「力」で重量打線ねじ伏せた! 11奪三振 読売新聞 1990-04-09
[65] 뉴스 ロッテ・村田兆治投手(四〇)が、江夏と村山の記録に並ぶ 読売新聞 1990-04-09
[66] 뉴스 村田「600試合目」完封で飾る 西武1年ぶり雪辱 ディアズ千金22号 読売新聞 1990-08-25
[67] 뉴스 村田さすが!お別れ完封 41年ぶり『40代2ケタ勝利』で引退に花 読売新聞 1990-10-14
[68] 웹사이트 【悼む】村田兆治さん、駆け出し記者相手でも「送っていってやろうか」 豪快に見えて繊細、人にやさしい本当にいい人 https://www.sanspo.c[...]
[69] 뉴스 村田、森氏 殿堂入り 読売新聞 2005-01-17
[70] 웹사이트 離島甲子園とは https://www.rito-kos[...]
[71] 웹사이트 「国土交通大臣杯 第13回全国離島交流中学生野球大会」(離島甲子園)について https://www.town.kam[...]
[72] 웹사이트 村田兆治さん、自宅火災で死亡…一酸化炭素中毒の可能性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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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웹사이트 村田兆治さん死去 タバコは発見されず、出火原因不明 死因は一酸化炭素中毒の疑い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2022-11-11
[75] 웹사이트 村田兆治さん死去 近隣住民「午前3時ごろにガラスが割れるような音がして、こげ臭いにおいが」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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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뉴스 「60歳で140キロ」の伝説持つ村田兆治さん 68歳で驚異の遠投100メートル、フォークボールも披露 始球式の球速めぐる裏話も https://www.zakzak.c[...] 株式会社産業経済新聞社 2022-11-13
[80] 웹사이트 『トルネード投法』から『ザトペック投法』まで!?歴代の名物投法を集めてみた http://g-times.jp/me[...]
[81] 웹사이트 村田兆治、「まさかり投法」で完投の美学貫く https://www.nikke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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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간행물 ツーシームみたいに 人生先発完投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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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뉴스 村田兆治さんの弟・光英さん 涙で兄を偲ぶ「私もまだ実感がなくて」暴行騒動後も「これを糧に頑張ると」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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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간행물 葬式ではあの人に弔辞を読んでほしい 2018-05-04
[92] 뉴스 首位打者 白 最多勝 東尾 本塁打 土井(太平洋) パ・リーグ公式日程終了 197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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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뉴스 後期最優秀選手は村田 1977-10-12
[95] 뉴스 パ前期MVPに村田 見事な復活で二度目の受賞 1981-07-02
[96] 뉴스 シリーズ表彰選手 1974-10-10
[97] 뉴스 プレーオフ表彰選手 1981-10-14
[98] 웹사이트 東京都文化賞・都民文化栄誉章 http://www.seikatubu[...] 東京都生活文化局
[99] 웹사이트 HEROs AWARD WINNER https://sportsmanshi[...]
[100] 뉴스 記録メモ(27日) ロッテ村田が通算1000奪三振 1977-09-28
[101] 뉴스 村田100勝マーク 1978-05-13
[102] 뉴스 ロッテ・村田兆治投手(三〇)が1500三振奪取 1980-06-23
[103] 뉴스 記録メモ 村田(ロッテ)通算150勝 1981-08-07
[104] 뉴스 500試合登板 1986-06-02
[105] 뉴스 ロッテ・村田兆治投手(四〇)が600試合登板 199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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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웹사이트 中田食品 http://www.nakatafoo[...]
[110] 웹사이트 DHC「スーパーエイチツー」イメージキャラクター 村田兆治さん起用のお知らせ 2018年5月7日(月)より全国でオンエア開始 https://prtimes.jp/m[...] 株式会社 PR TIMES 2018-05-10
[111] 웹사이트 SunSet Swishのニュー・シングル“ありがとう”のプロモ・クリップに村田兆治と有藤通世が出演 https://tower.jp/art[...] タワーレコード 200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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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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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간행물 ‘투심 패스트볼 같이 인생 선발 완투’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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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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